제가 뭐라고 이런 걸 남기나, 싶지만 간간이 월야 현건 연성을 보러 방문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 간략하게나마 씁니다. 요즘 저는 일과 개인적인 공부에 매여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간간이 동인계에서 제 글을 쓰고 있고요. 연재하던 <염원>은 4월은 되어야 아마 다시 잡을 수 있을 듯합니다. 동양물이라는 장르가 진입 장벽이 높고, &...
十三. 길고 긴 비도의 끝에 다다른 곳은 인적 드문 나루터였다. 강기슭에 자리한 나루터는 겨우 배 한두 척이나 댈 만큼 좁았으나, 누군가의 손길이 끊임없이 닿아 있는 듯이 잘 관리되어 있었다. 그 앞으로는 강줄기가 가장 넓어지면서도 격렬하게 만곡을 이루어 물결이 굽이치고 있었다. 세건은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지나온 길 입구가 숨겨진 곳은 겉으로 봐서는 송...
십이월. 경기도 ○○시 외곽, 논밭과 불안정한 흙길을 한참 달리다 보면 생뚱맞은 곳에 서 있는 커다랗고 예쁜 단층 건물이 나온다. 한 면은 화사한 베이지색 벽이 단단하게 서 있고, 맞은편 벽은 통유리로 되어 있는 건물의 한편엔 커다랗고 두꺼운 오크 색 나무문이 매달려 있고, 그 앞으로는 자동차 열두 대 정도는 충분히 세울 만큼 넓은 주차장이다. 요즘 인스타...
십이월. 며칠 내내 기분이 저조했다. 도시는 알 수 없는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숨길 기색도 없으니 누가 봐도 확연했고, 그 탓에 누구든지 설설 피해 다녔다. 유리문 너머에는 희망이 부풀어 환한 얼굴들이 발갛게 상기되어 도시를 쏘다녔다. 아르쥬나의 출입문은 마치 다른 세계의 경계 같았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그리고 새해를 앞둔 대도시...
십이월. “글쎄요, 말하자면 해리성 기억장애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정확히는 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저주에 의한 회귀성 기억장애라고 해야 할까요?” 한세건과 서현을 앞에 두고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어 나가는 김성희는 여전했다. 처음 만났던 그때 그대로, 깔끔한 레이저 컷으로 다듬은 롱헤어에 카지노 딜러를 연상케 하는 수트를 입고 우아하게 찻잔을 내온 그녀가 두 ...
十二. 동궁 후문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이어지는 담을 따라 빙 둘러가면 야트막한 산기슭에 닿는다. 산세가 높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만하지도 않고, 거대한 암석과 빽빽하고 길쭉하게 자라 엮인 나무들 사이사이로 음지 넝쿨이 여기저기 흐드러져 사람의 걸음을 허락지 않을 모양새다. 초입부터 커다랗게 자리한 바위 앞에 선 서현과 서린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세건...
십일월. 기묘한 상황이었다. 눈에 띄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한세건으로서도,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모호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는 로우 깁슨, 팬텀으로서도 예상한 적 없는 조우에 곤란함과 긴장감이 가중됐다. 온갖 인종이 섞여 거대한 파도처럼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바쁜 대도시 런던의 오후에, 유동인구가 많아 절친한 사람도 알아보기 어려운 리전트 스트리트에...
十一. 상참을 위해 정전에 모여 있던 대신들은 연신 눈치를 보며 숨을 들이켰다. 가시밭길 같은 분위기 속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여, 그대의 말은, 내 청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태자 서현이 서슬 퍼런 눈을 하고 재상 기진삼을 응시했다. 노려보는 눈매가 어찌나 무서운지, 저를 쳐다보는 것도 아닌데 기진삼 근처에 서 있던 대신들이 ...
十. 칠석을 보내고도 기세가 등등하던 무더위는 백로(白露)가 드니 신기하리만치 가라앉았다. 들판은 온통 노랗게 익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곡식들로 가득했고, 농민들은 중추절을 앞두고 곡식과 과실들을 거두느라 바쁘기 그지없었다. 신년 천제만큼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한 해의 결실을 보는 것이 중추절이다. 큰 명절을 맞이하여 햇곡식이며 귀하디귀한 과실과 특...
시월. 대도시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덩치 큰 공원 센트럴 파크를 붉고 노란 단풍이 수놓았다. 기온이 비교적 따뜻한 편인 뉴욕은 단풍이 비교적 늦은 편이다. 바쁜 대도시 한복판에 갑작스레 나타나는 이 거대한 부지 안에는 동물원부터 조각상, 유명한 록밴드 멤버를 추모하는 공간부터 저수지에 분수까지, 공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도시와는 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그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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